1910년 ~1945년 일제강점기 때 서울의 모습입니다.
빠르게 도시화가 진행 중이던 경성,
그리고 지금과는 다른 경성 시절의 세종로.
종로 한복판에 굉장히 눈에 띄는 건물이 보입니다.
종로에 위치한 의문의 건물.
바로 화신 백화점입니다. 전광판까지 있던 현대식 건물로 화신 백화점의 사장&건물주는 한때 경성의 성공한 사업가로서 세금을 가장 많이 낸 조선인.
박흥식이 일제강점기에 상위 0.1%의 부자가 된 비결은 영화 암살 보셨나요?
영화 암살에서 배우 이경영이 연기한 캐릭터입니다.
강인국은 경상의 거물급 사업가이자 친일파였는데, 강인국의 모티브가 박흥식입니다.
조선총독을 자애로운 아버지로 섬기며 감사편지까지 보냄. 일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일제에 전쟁 자금을 기부, 조선인 강제 징용까지, 박흥식의 실체 공개.
화신 백화점 성공 약 10년 전, 1926년.
종이 수요가 늘어날 거라는 시장의 흐름을 알고 종이 도매 회사 선일지물을 설립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부동산업, 유통업, 목축업, 미다스의 손인거에요.
손대는 사업마다 전부 성고함.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탄생시킨 것, 박흥식의 걸작이 화신 백화점입니다.
종로 보신각 근처에 위치한 종로타워.
약 40년 전까지만 해도, 종로 타워 자리에 있던 화신 백화점.
1987년 해체 전까지 있던 건물입니다. 근현대사문화유산으로 남겨야 한다고 하는데, 소유주와 상관없이 조선인들의 문화가 담겼다 생각을 했지만, 결국은 사라졌죠.
조선인들은 이 백화점에 정말 무한한 관심과 애정을 줍니다.
기존에 있던 백화점들은 일본인을 위한 백화점이었습니다.
기존의 일본 백화점하고 다르게 처음부터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을 위한 것.
이때가 실제로 물산장려운동이라고 해서
일본계 백화점들과 대등하게 경쟁할 만큼, 급격하게 성장하며 성공합니다.
당대 최고의 신문물 집합소.
박흥식은 백화점 곳곳에 정말 최신식 시설들을 설치합니다. 이중 이목을 집중시킨 것은?
우리나라 최초로 화신 백화점에 생긴 이것은? 바로 에스컬레이터입니다.
명물로 소문나며 장안의 화제가 됩니다.
입구에 들어오면 움직이지 않아도 자동으로 이동이 됐다고 해요.
여기에 신문물 엘리베이터까지 설치됩니다.
1930년대 화신 백화점 1층.
앞에 서있는 사람은 일본어로 데파트+ 걸.
화신백화점 엘리베이터 모습입니다.
가장 인기 있는 장소는 고가의 사치품이 한가득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에 가면,
양식, 일식, 한식까지 다양한 메뉴가 있었고, 서구적이고 현대적인 느낌입니다.
그뒤 경성 최고 부자의 자리까지 오른 박흥식.
우리가 식민 지배로 핍박받고 고통받던 일제강점기에 이렇게 막대하는 부를 쌓을 수 있었던 최고의 필살기는 친일이죠.
친일로 경성 최고의 부자가 됩니다.
민족을 등지고 양심을 팔아 부자가 된 박흥식. 그의 사업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준 곳이 있습니다.
바로 조선총독부입니다.
박흥식이 일제에 협력하고 촤신 백화점을 짓기 훨씬 이전이었던, 종이 도매업 때부터 일제와 결탁합니다.
사업이 급성장하다 보니까, 돈이 부족했을 때 해결방법은? 바로 대출, 일제 산하 은행에서 거액을 대출합니다.
조선총독부는 친일 사업가였던 박흥식에게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조선에서 대출을 받으려면 조선총독부의 허락 속에서 조선식산은행의 대출이 필요합니다.
조선총독부는 친일 사업가였던 박흥식에게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조선에서 대출을 받으려면 조선총독부의 허락 속에서 조선식산은행의 대출이 필요합니다.
조선인에게 민족 마케팅을 내세우면서 천일 행위로 사업을 키워 나가며 모순적인 삶을 살게됩니다.
그러면서 박흥식은 조선 총독을 자애로운 아버지로 섬기기도 하고 심지어 일본으로 넘어가서 일왕에게 직접 충성을 맹세하기까지 합니다.
사업가로서 승승장구한 것 자체가 든든한 뒷배이자 밑바탕이었던 조선총독부가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경성 최고의 부자라는 타이틀, 친일로 얻은 각종 이권과 특혜의 결과, 박흥식은 이런 일제의 도움으로 사업을 키우고, 그 과정에서 조선인들의 돈을 쓱쓱 쓸어 담았던 것이죠.
친일 본색을 드러낸 계기가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부터 였습니다.
적극적으로 호응한 조선인.
여러 친일 단체에서 활동하면서 일본군에게 거액 헌금을 합니다.
친일 단채, 기관의 간부 활동. 전쟁 자금을 벌어다주기까지 게다가 백화점 내에 걸린 전쟁 선전 구호.
전쟁에 정점을 찍게 되는 순간, 지금까지 해왔던 것과 전혀 다른, 새로운 사업을 합니다.
백화점 사장이 비행기 회사를 설립합니다. 군용 비행기만을 만드는 회사. 일제를 위한 군수 사업임.
조선총독부를 등에 없고, 안양 인근의 땅을 헐값에 매입하거나 몰수하며 10먄여 평 토지를 확보합니다.
조선인 노동력 착취 제도, 국민징용령에 따라 징용된 사람들, 그러니까 박흥식의 비행기 회사에서 일한 조선인들은 선택이 아닌 강제 노동을 합니다.
국민징용령은 1939년 10월 일제가 중일 전쟁에 조선인을 강제로 동원하고자 시행한 명령입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면서 전쟁이 끝났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전쟁이 종료되면서 비행기 역시 무용지물이 되고, 문을 닫게 된 비행기 회사.
그리고 조선 최고의 부자가 된 박흥식.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는 친일파 처벌을 위해 설치한 특별기구입니다.
이듬해 1월 박흥식은 반민특위 1호로 체포됩니다.
당시 반민특위에서 조사 중이던 친일파가 약 600여 명의 친일파중 1호 조사 대상이 된 이유는?
재빠르게 눈치를 챈 박흥식이
도망가지 못하게 1호로 체포된 것. 그렇게 반민특위 1호 체포자가 된 박흥식.
반민특위에 체포된 이후, 박흥식의 모습은?
반민 특위의 취조에 박흥식은 어쩔 수가 없었다.
박흥식은 오히려 본인이 피해자라고 주장합니다. 박흥식은 자신은 친일파가 아니라는 증거로 비행기 회사 설립을 수차례 거절했다고 강조합니다.
그럼에도 사업을 진행한 이유는 조선인을 위해서 한 거라고.
믿기지 않는 최종 판결,
어쩔 수가 없었다라는 주장을 인정, 사실 반민특위에 잡혀서 조사와 재판을 받던 친일파 대부분은
박흥식처럼 무죄나 미약한 지벌만 받고 석방됩니다. 이들은 각 분야에서 영향력을 지닌 사람들로
정치적 갈등이나 이념 논리로 변질됩니다.
큰 성과를 남기지 못한 채, 반민특위는 해체됩니다.
" 우리는 친일파 청산에 실패했습니다. "
경성 최고의 부자인 박흥식, 그가 저지른 수많은 악행들, 그리고 어떠한 처벌도 없었다.
처벌받은 친ㅇ닐파는 0명 반민특위 이후에 박흥식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늘 그래왔듯이
그리고 죽을 때까지 단 한번의 진정 어린 사과와 반성조차 하지 않습니다.
박흥식이 사망하고 15년이 지난 2009년 대한민국정부가 그의 이름을 다시금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를 통해
친일인명사전 발간한 시민단체가 박흥식에게 내린 정의는?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는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
"그것은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과 똑같이 어리석은 것이다."
역사에 공소시효는 없습니다.
출처: 史기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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