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위 조선의 문화재를 지켜라
한국의 자랑스러운 국보,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은 경주 석굴암.
어떤 대한 외국인의 도움 덕분일까??
통한의 일제 강점기, 역사에서 잊힌 석굴암의 가치를 알아본 사람은 바로 독일에서 온 대한 외국인입니다.
예카르트는 훼손되던 석굴암의 복원을 강력히 주장했는데, 이후 석굴암에 대한 기록을 남긴 에카르트가 아니었다면 석굴암은 영원히 묻혔을 수도 있겠네요.
한국 미의 정수를 담은 문화재에 매료된 최초 한국 학자, 석굴암뿐 아니라 구례 화엄사, 화순 운주사 등 한국 문화재가 있는 곳이면 20년간 전국을 방문해 기록하고 1929년 한반도 역사상 최초 한국 미술사를 전 시대와 전 지역으로 총망라했고,
우리 문화재들의 당시 모습과 현재 모습 비교가 가능합니다. 조선미술사는 미술사 연구에 큰 도움이 되었죠. 조선이 속국이 아닌 자주적인 나라임을 설파, 자칫 소실될 뻔했던 한국 문화재의 계보를 이어준 에카르트.
나아가 조선의 미술을 세계에 알린 문화 독립운동가. 한국을 사랑했기에 가능했던 한국 학자의 업적.
조선의 미술에는 그의 사랑이 깃들어 있습니다.
5위 광복군의 엘리트 비밀공작원
1944년 중일 전쟁 중 중국 장쑤성 난정시에 모인 수십 명의 조선인.
일본군의 삼엄한 경계망을 뚫기에는 위험한 시도죠. 하지만 단 한명의 낙오자도 없이 도착했는데!! 바로 한국광복군의 비밀 스파이 덕분입니다.
50일 이상 도보 이동할 경우 숙식 문제 등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은데, 게다가 일본군에게 들킬 위험이 크죠. 당시 20대였던 쑤징허는 난징 중앙 대학교 재학 중 중국 내 엘리트였고, 안정적인 삶이 보장된 상황인데도 학생 비밀 결사 단체 활동에서 조선인 독립투사 조일문과 만났다고 합니다.
쑤징허는 조선의 비밀 첩보 요원을 자청,
처음 듣는 이름인 쑤징허, 한국광복군 비밀 요원으로서 대활약한 쑤징허, 조선인들을 세 차례에 걸쳐 한국광복군 부대로 호송, 일본군의 감시를 피하고 수십 명의 숙식 문제를 해결, 이후 공로를 인정받아 광복직후 포상장을 받은 쑤징허.
대한 광복군의 비밀요원인 중국인 쑤징허. 조선인들과 우리나라를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4위 000의 진실을 밝힌 일본인.
일본인 하야시에게 무슨 일이...? 한국을 위해 어떤 활동을 했을까? 일본을 배신하고 조선인 편에 섰기에 일본 국민도 아니다?!
일반인 하야시가 살해 협박을 받은 이유는?!
1990년 출판한 하야시의 저서 때문입니다. 청산되지 않은 쇼와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으로, 진실을 밝힌일본인.
일본 정부의 부인에도 자진해서 진실을 기록한 지식인의 책,
탄광에서 탈출한 조선인들을 돕다가 잡혀서 고문 끝에 사망한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를 여읜 뒤 빚더미에 앉고 이웃들에게 역적의 자식이라 손가락질까지 받은 하야시.
그런 하야시에게 위안이 된 것은?!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돈을 건넨 조선인들이었던 거죠. 성인이 된 하야시의 가슴에 남은 것은 강제 연행된 조선인들에 대한 애환이었습니다.
사명감을 갖고 조선인 강제 동원의 진실을 기록, 조선인을 돕다 고문으로 사망한 하야시의 아버지. 원한을 가지는 것이 아닌 아버지와 같은 길을 선택 한 것.
생각보다 더 험난했던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길. 일본 정부는 조선인 강제 연행을 부인, 같은 일본인들은 배신자라 욕하며 협박까지 했죠. 갖은 압박을 견뎌내야 했던 하야시.
작은 정보라도 얻기 위해 한 마을의 400여 가구를 일일이 방문하고 집요하게 취재한 결과, 군함도와 사키토 탄광 광부들의 화장 허가서를 발견했습니다.
일본의 만행을 널리 알리기 위해 주저하지 않았던 일본인, 2017년 사망, 마지막까지 조선인 강제 연행의 진실을 빍히려 노력했습니다.
결코 쉽지 않았을 조국의 치부를 밝히는 일. 양심있는 일본인들이 있기에 아직 희망이 남아 있습니다. 하야시의 평생 바람이었던 일본의 사죄.
일본은 더 이상 조선인 강제 연행의 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출처: 프리한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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